아킬레우스는 메노이티오스의 아들 파트로클로스와 일행을 데리고 자기 막사와 배로 돌아갔다. 한편 아가멤논은 배 한 척을 물에 띄우고 노잡이 스무 명을 골랐다. 그 배에 크리세이스를 태우고 신에게 바칠 헤카톰베★도 함께 실었다. 그때 오디세우스가 그 배의 지휘를 맡았다. 그들은 배에 올라 바다를 가로질러 떠났다.
아가멤논은 다른 병사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몸을 씻고 더러운 것을 바다에 버렸다. 그런 다음 바닷가에서 흠 없는 황소와 염소를 헤카톰베로 바쳤다. 제물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향긋한 냄새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올라갔다. 병사들이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에도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했던 위협을 잊지 않았다. 그는 믿음직한 전령이자 시종인 탈티비오스와 에우리바테스를 불렀다.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가서 브리세이스를 데려오너라. 그가 내주지 않겠다면 내가 다른 자들과 함께 가서 직접 데려오겠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는 더욱 참혹한 일이 될 것이다.”
아가멤논이 엄하게 명령하여 보내니, 두 전령은 원치 않는 걸음으로 황량한 바닷가를 따라 걸어가 미르미돈족의 배와 막사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은 아킬레우스가 막사와 배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킬레우스는 그들을 보자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두 사람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품고 아킬레우스 앞에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입을 열었다.
“신들과 인간들의 전령들이여, 어서 오시오. 내 원한은 그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브리세이스라는 여인을 데려오라고 보낸 아가멤논에게 있소. 그러니 파트로클로스, 그 여인을 데려와 이들에게 넘겨주게. 다만 이 두 분이 복되신 신들과 필멸의 인간들 앞에서, 그리고 저 격렬하게 분노하는 아가멤논왕 앞에서 증인이 되게 해주게. 언젠가 다시 내가 백성들을 파멸에서 구해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그들을 구하지 않을 것임을 증언하게 하게. 아가멤논은 분노에 눈이 멀어 아카이아인들이 안전하게 자기 배 곁에서 싸울 수 있도록 앞뒤 상황을 살피지도 못하고 있네.”
파트로클로스는 사랑하는 친구가 시킨 대로 했다. 그는 막사에서 브리세이스를 데려와 전령들에게 넘겨주었다. 전령들은 그녀를 데리고 아카이아인들의 배로 향했다. 브리세이스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그 뒤 아킬레우스는 홀로 잿빛 바닷가를 거닐며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불사의 어머니에게 기도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짧은 생의 운명으로 저를 낳으셨지요. 올림포스에서 천둥을 울리는 제우스께서 그 짧은 생이나마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실 수도 있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저를 모욕하고 제 전리품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가 큰 소리로 울며 말하자, 바닷속 깊은 곳에서 늙은 아버지 곁에 앉아 있던 어머니 테티스가 그 소리를 들었다. 테티스는 곧바로 파도 사이에서 잿빛 안개처럼 솟아올라 아들 앞에 앉았다. 그리고 울고 있는 아킬레우스의 몸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얘야,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무엇이 너를 그토록 슬프게 하느냐? 내게 숨기지 말고 말해 보아라. 내가 알 수 있도록.”
아킬레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머니도 이미 알고 계시잖습니까? 다 알고 계신 일을 무엇하러 다시 말씀드리겠습니까? 우리는 에에티온이 다스리는 견고한 도성 테베로 가서 그곳을 약탈하고 전리품을 가져왔습니다. 아카이아인들은 그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누었고, 그중 아름다운 크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의 몫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가 딸 크리세이스를 되찾으려고 아카이아인들의 배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막대한 몸값을 가져왔고, 손에는 간청하는 자를 상징하는 화환이 감긴 아폴론의 홀을 들고 있었지요. 그는 아카이아인들에게 간청했으며, 특히 아카이아인들의 우두머리인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아카이아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사제를 존중해서라도 그가 가져온 딸의 몸값을 받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달랐습니다. 그는 사제에게 거칠게 말하며 무례하게 쫓아냈습니다. 사제는 분노하며 돌아갔고, 그를 몹시 아끼는 아폴론은 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폴론은 아르고스인들에게 치명적인 화살을 퍼부었습니다. 아카이아인들의 넓은 진영 곳곳에 화살이 날아들었고, 사람들이 잇달아 쓰러져 죽었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예언자가 아폴론의 신탁을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처음 말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자 아가멤논이 분노하며 일어나 내가 사랑하는 브리세이스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제 아카이아인들은 배에 크리세이스를 태워 크리세로 보내고 있으며,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제물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령들은 방금 제 막사에서 브리세우스의 딸을 데려갔습니다. 그녀는 아카이아인들이 제 몫으로 정해 주었던 여인입니다.
그러니 부디 힘이 닿는다면 당신의 용감한 아들을 도와주십시오. 올림포스로 가셔서, 어머니께서 말이나 행동으로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은혜를 베푸신 적이 있다면 그에게 도움을 청해 주십시오. 저는 아버지의 집에서 어머니께서 자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헤라와 포세이돈, 아테나와 함께 다른 신들이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를 결박하려 했을 때, 오직 어머니만이 그를 파멸에서 구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백 개의 팔을 가진 거인을 올림포스로 불러오셨습니다. 그 거인을 신들은 ‘브리아레오스’라고 부르고 인간들은 ‘아이가이온’이라고 부르지요. 그 거인은 자기 아버지보다도 강한 존재였습니다. 그가 제우스 곁에 영광스럽게 앉자 다른 신들은 두려워했고, 감히 제우스를 결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우스께 가셔서 그 일을 상기시키고, 그의 무릎을 부여잡고 그가 트로이인들을 돕게 해주십시오. 아카이아인들을 그들 배의 선미 쪽으로 몰아넣어 바닷가에서 죽게 하시고, 그들이 아가멤논왕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맛보게 하십시오. 그리고 아가멤논은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사인 저를 모욕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십시오.”
테티스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내가 어찌하여 너를 낳고 젖을 먹여 길렀는지, 아들아. 차라리 네가 네 배 곁에서 아무런 슬픔도 겪지 않고 주어진 생을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의 삶은 너무나 짧구나. 아아,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수명은 짧고 슬픔은 더 많이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로구나. 내가 너를 낳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참으로 비통하구나.
그래도 눈 덮인 올림포스의 봉우리로 가서 제우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해 보마.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지도 모르니…. 그동안 너는 배 곁에 머물며 아카이아인들을 향한 분노를 품되, 전투에서 손을 떼거라. 제우스는 어제 다른 신들과 함께 오케아노스에 가서 에티오피아인들의 잔치에 참석했단다. 열이틀 뒤에야 올림포스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내가 청동으로 꾸며진 아버지의 궁전으로 찾아가 간청하마.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테티스는 아들을 떠났다. 아킬레우스는 빼앗긴 여인 때문에 여전히 격분한 채 그곳에 남아 있었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헤카톰베를 싣고 크리세에 도착했다. 항구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돛을 접어 배 밑창에 보관하고, 앞 돛대의 버팀줄을 느슨하게 풀고 돛대를 제자리에 내려놓은 다음, 노를 저어 배를 정박할 곳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닻돌을 던져 내리고 굵은 밧줄로 배를 단단히 묶었다. 그런 다음 바닷가로 내려와 아폴론에게 바칠 헤카톰베를 배에서 내렸다. 크리세이스도 배에서 내렸다. 오디세우스는 그녀를 제단으로 데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크리세스여, 따님을 돌려보내고, 아르고스인들에게 슬픔을 안겨준 아폴론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다나오스인들을 대신하여 제물을 바치라고 아가멤논왕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말하고 크리세이스를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크리세스는 기쁜 마음으로 딸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신의 제단 주위에 거룩한 헤카톰베를 질서 있게 늘어놓았다. 그들은 손을 씻고 보릿가루를 집어 제물 위에 뿌릴 준비를 했다. 그동안 크리세스는 두 손을 들어 그들을 대신해 큰 소리로 기도했다.
“은빛 활의 신이시여, 제발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크리세와 거룩한 킬라를 지켜 주시고, 강력한 힘으로 테네도스를 다스리시는 분이여! 예전에 제가 기도했을 때 제 말을 들어주시고 아카이아인들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셨듯이, 이번에도 제 기도를 들어주시어 다나오스인들을 괴롭히는 이 무서운 역병을 멈추어 주소서.”
크리세스가 이렇게 기도하자 아폴론은 그 기도를 들어주었다. 기도를 마치고 보릿가루를 뿌린 뒤, 사람들은 제물의 머리를 뒤로 젖혀 죽이고 가죽을 벗겼다. 넓적다리뼈를 잘라 내어 두 겹의 지방으로 감싸고 그 위에 날고기를 몇 점 얹었다. 그런 다음 크리세스가 그것들을 장작불 위에 올리고 포도주를 부었다. 젊은이들은 다섯 갈래로 된 꼬챙이를 손에 들고 그의 곁에 서 있었다.
넓적다리뼈가 불에 타자 사람들이 내장 고기를 맛본 뒤에는, 나머지 고기도 잘게 썰어 꼬챙이에 꿰어 알맞게 구워냈다. 모든 준비가 끝나 잔치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음식을 먹었다. 누구나 자기 몫을 넉넉히 받아 배불리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술도 충분히 마시자, 시종들이 큰 술 항아리에 포도주와 물을 섞어 채운 뒤 사람들에게 돌렸다. 그에 앞서 모든 사람은 신에게 술을 조금씩 바쳤다. 이렇게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며 신을 찬양했다. 기쁨에 찬 파이안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자, 아폴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사람들은 배의 고물★ 쪽 밧줄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어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나타나자, 그들은 다시 아카이아인들의 진영을 향해 출항했다. 아폴론은 그들에게 순풍을 보내 주었다. 사람들은 돛대를 세우고 하얀 돛을 높이 펼쳤다. 바람을 받아 돛이 부풀어 오르자 배는 짙푸른 바다 위를 빠르게 달렸고, 배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뱃머리에 물거품이 일며 쉭쉭 소리를 냈다.
아카이아군이 주둔한 넓은 진영에 도착하자, 그들은 배를 모래사장 위로 끌어올려 물이 닿지 않는 곳에 놓았다. 튼튼한 받침대를 배 밑에 괴어 놓은 뒤 각자 자기 막사와 배로 돌아갔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배 곁에 머물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다. 오직 전투와 함성에 대한 갈망으로 속을 태우며 괴로워했다.
열이틀이 지나자 불사의 신들이 제우스를 선두로 모두 함께 올림포스로 돌아왔다. 테티스는 아들이 부탁한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바닷속에서 솟아올라 이른 아침 하늘을 가로질러 올림포스로 향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산마루에 홀로 앉아 있는 강력한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를 발견했다. 테티스는 그의 앞에 앉아 왼손으로 제우스의 무릎을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턱 아래를 감싸며 간청했다.
“아버지 제우스여, 제가 불사신들 가운데서 말이나 행동으로 아버지께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면 부디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너무나 일찍 생을 마감하게 될 제 아들에게 영예를 베풀어 주소서. 아가멤논왕은 제 아들의 전리품을 빼앗아 차지함으로써 아들을 모욕했습니다. 그러니 올림포스의 지혜로운 통치자시여, 아버지께서 직접 제 아들에게 명예를 돌려주시고, 아카이아인들이 제 아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하고 값진 재물을 가득 안겨 줄 때까지 트로이인들이 승리하게 해 주소서.”
제우스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그러나 테티스는 그의 무릎을 단단히 붙잡은 채 다시 한번 간청했다.
“고개를 끄덕여 약속해 주소서. 확실하게 약속해 주시든지, 아니면 제 청을 거절해 주소서. 아버지께서는 두려워하시는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야 아버지께서 저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제우스는 몹시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참으로 큰일이로다. 네가 나를 헤라와 다투게 하려 하는구나! 헤라는 비꼬는 말로 나를 긁을 것이다. 지금도 다른 신들 앞에서 나를 끊임없이 비난하며 내가 트로이인들을 돕는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헤라가 눈치채기 전에 이제 돌아가거라.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고 네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겠다. 네가 믿을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여 약속하겠다. 이것은 내가 어떤 신에게든 할 수 있는 가장 엄숙한 약속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 말은 취소될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없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없느니라.”
제우스는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때 그의 불사의 머리에서 신성한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그 순간 거대한 올림포스산 전체가 진동했다. 두 신은 이렇게 약속한 뒤 헤어졌다. 제우스는 자기 궁전으로 돌아갔고, 테티스는 찬란한 올림포스를 떠나 바다 깊은 곳으로 뛰어들었다.
제우스가 돌아오자 신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아버지가 다가오는데도 앉아 있는 신은 하나도 없었다. 제우스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헤라는 제우스를 보자마자 그와 은빛 발을 가진 늙은 바다 신의 딸 테티스가 몰래 무언가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곧바로 그를 몰아세웠다.
“교활한 자여! 이번에는 어떤 신과 몰래 의논한 것입니까? 당신은 언제나 내 등 뒤에서 일을 꾸미면서, 내게는 늘 한마디도 알려 주지 않으시는군요!”
제우스가 대답했다.
“헤라여, 내 모든 계획을 다 알려고 하지 마시오. 내 아내라 할지라도 알기 어려운 법이오. 들을 만한 일이라면 신이나 인간 누구보다 당신이 가장 먼저 듣게 될 것이오. 그러나 내가 다른 신들 몰래 계획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 물으려 하지 말고 감시하려 하지도 마시오.”
헤라가 대답했다.
“두려운 크로노스의 아들이여!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캐묻고 참견한다고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당신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지만 은빛 발을 가진 늙은 바다 신의 딸 테티스가 당신을 설득한 것이 틀림없다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군요. 오늘 아침 바로 그 딸이 당신 곁에 와서 당신의 무릎을 붙잡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당신이 아킬레우스에게 영광을 안겨 주고 아카이아인들의 배 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제우스가 말했다.
“아내여, 당신은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의심하고 결국 알아내고 마는구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오. 오히려 내 마음에서 멀어질 뿐이니 그것이 당신에게 더욱 참혹한 일이 될 것이오. 당신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나는 그렇게 하기로 이미 마음먹었소. 그러니 자리에 앉아 내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무시오. 내가 손을 들어 당신을 치기라도 한다면, 온 하늘의 신들이 당신 편을 든다 해도 당신을 구하지 못할 것이오.”
헤라는 겁을 먹고 고집을 꺾은 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제우스 궁전에 있던 신들도 모두 불안에 휩싸였다. 그때 꾀가 많고 솜씨 좋은 장인 헤파이스토스가 어머니 헤라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한낱 인간들 때문에 다투고 하늘을 소란스럽게 만드신다면 정말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불화가 계속된다면 우리의 잔치도 즐거울 수 없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제우스와 화해하십시오. 그래야 아버지께서 다시 어머니를 꾸짖고 우리의 잔치를 망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올림포스의 천둥을 울리시는 분께서 우리 모두를 자리에서 내던지려 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운데 누구보다도 강하시니까요. 그러니 부드러운 말로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 드리십시오. 그러면 아버지도 곧 우리에게 다시 너그러워지실 것입니다.”
헤파이스토스는 말을 마치고 넥타르가 담긴 두 손잡이의 잔을 들어 어머니의 손에 건넸다.
“어머니, 기운을 내시고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저는 어머니를 몹시 사랑합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 매를 맞으시는 모습을 본다면 정말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아무리 속이 상하더라도 제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우스께 맞선다면 누구도 당해낼 수 없으니까요. 예전에 제가 어머니를 도우려 했을 때도 제우스께서는 제 발목을 붙잡아 하늘의 문턱에서 저를 내던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하루 동안 떨어지다가 해 질 무렵에야 렘노스섬에 떨어졌습니다. 그때는 목숨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었는데, 신티아인들이 저를 발견해 돌봐 주었습니다.”
헤라는 이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아들이 건네준 잔을 받아 들었다. 헤파이스토스는 큰 술 항아리에서 달콤한 넥타르를 떠서 신들에게 차례로 따라 주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잔을 채우는 그의 분주한 모습을 보고 축복받은 신들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잔치가 이어졌다. 모든 신은 각자 넉넉히 먹고 마셔 배를 채웠다. 아폴론은 리라를 연주했고, 뮤즈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며 서로 화답했다.
찬란한 태양의 빛이 사라지자 신들은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의 거처는 절름발이 헤파이스토스가 뛰어난 솜씨로 지어 준 것이었다. 올림포스의 천둥을 울리는 지배자 제우스도 늘 잠을 자던 침실로 서둘러 갔다. 그는 침상에 올라 황금 옥좌의 여신 헤라를 곁에 두고 잠이 들었다.
★ 신에게 바치던 대규모 희생제, 또는 그때 바치는 제물을 뜻한다. 본래 소 백 마리를 바치는 제사였다.
★ 파이안의 노래: 아폴론 신에게 바치는 찬양의 노래
★ 배의 고물: 배의 뒷부분. 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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