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메넬라오스왕을 찾아가다
텔레마코스 일행은 지대가 낮은 도시, 라케다이몬에 이르러 곧장 메넬라오스의 궁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메넬라오스가 많은 친족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 잔치는 메넬라오스의 아들과 딸의 결혼을 함께 축하하는 자리였다. 메넬라오스의 딸은 용맹한 전사 아킬레우스의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트로이에 있을 때부터 이미 딸을 결혼시키기로 약속했으며, 이제 신들의 뜻에 따라 혼인이 성사되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다스리는 미르미돈족의 도시로 딸을 보내기 위해 전차와 말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메넬라오스의 외아들 메가펜테스의 신붓감으로는 스파르타의 아클레토르의 딸을 맞이했다. 메가펜테스는 여자 노예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헬레네가 황금빛 아프로디테만큼이나 아름다운 헤르미오네를 낳은 뒤로는 하늘이 더 이상 그녀에게 자녀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넬라오스는 노예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메넬라오스의 이웃들과 친족들은 그의 궁전에서 잔치를 벌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음유 시인도 한 사람 있어서 노래를 부르며 수금을 연주했고, 그가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두 명의 곡예사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재주를 부렸다.
텔레마코스와 네스토르의 아들 피시스트라토스는 궁전 문 앞에서 말들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메넬라오스의 시종 에테오네우스가 밖으로 나왔다. 시종은 그들을 보자마자 궁 안으로 급히 달려 들어가 메넬라오스왕에게 고했다.
“메넬라오스왕이시여, 낯선 손님 두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우스의 아들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에서 마구를 풀어 주고 맞아들일까요, 아니면 다른 곳에서 묵을 곳을 알아보라고 할까요?”
메넬라오스는 몹시 화를 내며 말했다.
“보이토오스의 아들 에테오네우스야, 원래는 어리석지 않았는데, 바보 같은 말을 하는구나. 당연히 말에서 마구를 풀고 그 손님들을 안으로 모셔 저녁을 먹이도록 해야지. 우리도 이곳에 돌아와 평화롭게 쉴 수 있게 되기까지 타인의 집에서 신세를 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늘….”
에테오네우스는 곧장 돌아가 다른 시종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시종들은 땀에 젖은 말들을 멍에에서 풀어 구유에 매어 놓고 귀리와 보리를 섞은 먹이를 주었다. 그런 다음 전차를 안뜰 끝의 벽에 기대어 놓고, 손님들을 궁전 안으로 안내했다.
텔레마코스와 피시스트라토스는 태양과 달처럼 찬란한 저택의 화려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마음껏 구경한 뒤 목욕탕으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시종들이 두 사람을 씻기고 향유를 발라준 뒤 양털로 만든 망토와 속옷을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걸치고 메넬라오스 곁에 자리를 잡았다.
한 시녀가 아름다운 황금 주전자에 물을 담아 와 은 대야에 부어 두 사람이 손을 씻게 했다. 그리고 깨끗한 상을 그들 앞에 끌어다 놓았다. 서열이 높은 하인이 빵을 가져오고 궁전에 있는 온갖 좋은 음식을 내놓았다. 고기를 써는 하인은 여러 종류의 고기를 접시에 담아 가져왔고, 두 사람 곁에는 금잔을 놓아 주었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그들을 환대하며 말했다.
“어서 마음껏 드시게. 환영하오. 식사를 마치면 그때 그대들이 누구인지 묻도록 하겠네. 그대들처럼 훌륭한 사람들의 혈통이 끊겼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일세. 그대들은 분명 홀을 든 왕들의 혈통으로 태어났을 것이네. 가난한 집안에서는 자네들처럼 훌륭한 아들들이 나올 리 없네.”
메넬라오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곁에 놓여 있던 최고급 부위인 등심 한 점을 집어 그들에게 건넸다. 텔레마코스와 피시스트라토스는 앞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에 손을 뻗어 식사를 즐겼다. 배불리 먹고 마신 뒤, 텔레마코스는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네스토르의 아들 피시스트라토스에게 머리를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보게, 피시스트라토스, 마음이 참으로 잘 통하는 친구여, 정말 놀랍지 않은가? 저 청동과 금, 호박, 상아와 은이 빛나는 것을 보게. 모든 것이 이렇게 눈부시게 화려하다니, 마치 올림포스의 제우스 궁전에 와 있는 것 같군.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어.”
메넬라오스는 그의 말을 듣고 말했다.
“여보게, 젋은이들! 제우스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제우스의 궁전과 그곳의 모든 것은 영원불멸하니까. 하지만 필멸하는 인간들 가운데서는 나만큼 부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나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녔고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네. 함대를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만 거의 8년이나 걸렸으니까.
나는 키프로스와 페니키아와 이집트인들의 땅을 두루 다녔고, 에티오피아인들과 시돈인들, 에렘비아인들의 땅에도 갔었지. 그리고 리비아에도 갔었는데, 거기서는 갓 태어난 어린 양에게도 뿔이 나 있고 암양들이 일 년에 세 번씩 새끼를 낳았지. 그 나라에서는 주인이든 하인이든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치즈와 고기와 좋은 우유를 풍족하게 먹을 수 있지. 암양들이 일 년 내내 젖을 내어주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내가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큰 재산을 모으는 동안, 내 형은 사악한 아내의 배신으로 은밀하고도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말았지. 그래서 이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한다네.
자네 부모님이 누구이든, 아마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네. 훌륭하고 호화롭게 꾸며졌던 저택이 폐허가 되면서 내가 겪은 그 막대한 손실에 대해서도 들었을 테지. 차라리 지금 가진 재산의 3분의 1만 가지고 고향에 머물렀더라면, 그리고 아르고스에서 멀리 떨어진 트로이 평원에서 목숨을 잃은 그 모든 이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이곳에 앉아 있을 때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며 자주 슬퍼한다네. 때로는 너무 슬퍼서 큰 소리로 울기도 하지. 하지만 곧 울음을 그친다네. 울어 보아야 별 위로가 되지도 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치게 되니까.
그들 모두를 위해 애도를 보내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한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아프다네. 그 사람을 생각하기만 해도 음식도 잠도 싫어질 만큼 괴롭기 그지없다네.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사람만큼 힘겨운 일을 하고 그만큼 많은 위험을 무릅쓴 사람은 없었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나에게는 슬픔만을 남겼지. 그가 떠난 지 오래되었건만, 우리는 그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네. 그의 늙은 아버지와 오랜 고난을 견디고 있는 아내 페넬로페, 그리고 그가 떠날 때 아직 품에 안겨 있었던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까지 모두 그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네.”
메넬라오스가 이렇게 말하자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생각이 나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이 두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두 손으로 망토를 얼굴 앞으로 들어 눈물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본 메넬라오스는 텔레마코스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지금 당장 이유를 물어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헬레네가 향기가 감도는 높은 아치형 천장의 방에서 내려왔다. 그녀의 모습은 여신 아르테미스처럼 아름다웠다. 아드라스테는 그녀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었고, 알키페는 부드러운 양털 깔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필로는 폴리보스의 아내 알칸드라가 그녀에게 선물한 은제 받짇고리를 가져왔다. 폴리보스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이집트의 테베에 살고 있었다. 그는 메넬라오스에게 순은으로 만든 목욕통 두 개와 삼발이 두 개, 그리고 금 10달란트를 주었다. 또한 그의 아내는 헬레네에게 아름다운 선물들을 주었는데, 금으로 만든 실 잣는 물레와, 바퀴가 달리고 윗부분에 금테를 두른 은제 반짇고리였다. 필로는 고운 실이 가득 담긴 이 반짇고리를 헬레네 곁에 놓았고, 그 위에는 보랏빛 양털이 감긴 실패가 얹혀 있었다. 헬레네는 자리에 앉아 발을 발받침대에 올려놓고 남편에게 물었다.
“메넬라오스, 저기 우리를 찾아온 낯선 손님들의 이름을 알고 있나요? 내가 한번 추측해 볼까요? 맞을지 틀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나는 지금까지 남자든 여자든 누군가와 이렇게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정말이지 그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예요. 저 젊은이는 오디세우스가 갓난아기였을 때 두고 떠났던 아들 텔레마코스와 너무나 닮았어요. 그때 아카이아인들이 나의 수치스러운 일 때문에 전쟁할 마음을 품고 트로이로 떠났지요.”
메넬라오스가 대답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당신이 보는 닮은 점이 나에게도 보이오. 그의 손과 발은 오디세우스와 똑같고, 머리카락도 그렇소. 머리 모양과 눈빛까지 닮았지. 게다가 내가, 오디세우스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를 말해 주었더니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소. 그리고 그는 망토로 얼굴을 가렸지.”
그러자 피시스트라토스가 말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여, 이 젊은이가 텔레마코스라고 생각하신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품이 매우 겸손한 사람으로, 신의 은총을 입어 그 말씀이 참으로 흥미롭고 훌륭한 분께 감히 먼저 다가가 대화하기를 쑥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 네스토르께서 저에게 그를 이곳까지 데려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왕께서 텔레마코스에게 어떤 조언이나 도움의 말을 해주실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없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은 아들은 언제나 집안에서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지금 텔레마코스가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떠나고 없고, 자기 백성 가운데에는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메넬라오스가 대답했다.
“이런 일이 다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손님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친구의 아들이로다. 그 친구는 나를 위해 숱한 고난을 겪었지. 나는 신들이, 오디세우스가 바다 건너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기만 한다면 그를 더없이 성대하게 맞아 주리라고 늘 생각해 왔네. 나는 아르고스에 그를 위한 성읍을 세우고 집도 지어 주려 했지. 그리고 그가 이타카에서 재산과 아들과 모든 백성을 데리고 나오도록 하여 내게 복종하는 인근 성읍 중 하나를 내어주려 했네. 그랬다면 우리는 늘 서로를 보며 지냈을 테고, 죽음만이 우리의 친밀하고 행복한 교류를 갈라놓을 수 있었을 걸세. 하지만 신들께서는 우리가 그런 큰 복을 누리는 것을 시기하셨는지 그 가련한 친구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드셨다네.”
메넬라오스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헬레네도 텔레마코스도 메넬라오스도 울었다. 피시스트라토스 역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빛나는 새벽의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랑하는 형 안틸로코스를 떠올리며 눈물을 적셨다. 피시스트라토스가 메넬라오스에게 말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여, 제 아버지 네스토르께서는 당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당신이 매우 지혜롭고 훌륭한 판단력을 지닌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저는 식사를 하면서 눈물 흘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머지않아 아침이 밝아올 테니, 그때가 되면 죽어간 이들을 위해 얼마든지 눈물을 흘려도 상관없겠지요. 불쌍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입니다. 머리를 깎고 뺨에서 눈물을 닦아 내는 것뿐이지요. 저에게도 트로이에서 죽은 형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하나였지요. 당신께서도 분명 그를 알고 계실 겁니다. 이름은 안틸로코스였습니다. 저는 형님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유난히 발이 빠르고 전투에서도 용맹했다고 합니다.”
메넬라오스가 대답했다.
“친구여, 자네의 분별력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뛰어나구나. 아버지를 닮은 것이 분명하네. 하늘이 네스토르에게 아내와 자식 복을 모두 내려주셨도다. 그는 평생토록 하늘의 축복을 누리며, 집안에서 훌륭한 성품과 용맹함을 겸비한 아들들에 둘러싸여 건강하고 활기찬 노후를 보내고 계시지. 그러니 이제 눈물을 거두고 다시 저녁 식사를 즐기도록 하세나. 손을 씻을 물을 가져오게 하라. 텔레마코스와 나는 아침에 실컷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
그러자 시종 가운데 한 사람인 아스팔리온이 그들의 손에 물을 부어 주었고, 그들은 앞에 놓인 맛있는 음식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제우스의 딸 헬레네는 문득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녀는 근심과 슬픔, 언짢은 기분을 모두 씻어주는 약초를 포도주에 탔다. 이 약을 탄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그날 하루 종일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게 되었다. 설령 부모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거나, 형제나 아들이 눈앞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해도 말이다. 이토록 놀라운 효능을 지닌 약은 이집트 여인 톤의 아내 폴리담나가 헬레네에게 준 것이었다. 이집트는 온갖 종류의 약초가 자라는 땅으로, 그중에는 술에 섞어 마시기 좋은 것도 있고, 치명적인 독초도 있었다. 게다가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의술의 신 파이온의 후예였기 때문이었다. 헬레네는 술잔에 이 약을 타 넣고는 시종들에게 포도주를 돌리게 한 뒤, 이렇게 말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여, 그리고 고귀한 가문의 아들들인 좋은 친구들이여. 이 모든 것은 선과 악을 모두 주관하며 뜻하는 바를 행하시는 제우스의 뜻에 따른 것이니, 여기서 마음껏 잔치를 즐기며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오. 나는 오디세우스가 이룬 모든 공적을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트로이성 앞에서, 그리고 아카이아인들이 온갖 난관에 처해 있을 때 어떤 일을 했는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온몸에 상처와 멍이 든 채 누더기를 걸치고, 아군들 사이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마치 하인이나 거지처럼 적의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변장한 채 트로이 시내로 들어갔지만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나만이 그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지요. 하지만 그는 너무나 교묘해서 나를 속여 넘겼습니다. 내가 그를 씻기고 기름을 발라 새 옷을 입혀준 뒤, 그가 무사히 아군 진영과 배로 돌아갈 때까지 트로이인들에게 밀고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하자, 그제야 나에게 아카이아인들의 계획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아르고스 진영으로 돌아가기 전 많은 트로이인을 죽이고 중요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그 일로 트로이 여인들은 통곡했으나 저는 기뻤습니다. 내 마음이 점점 고향을 그리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아프로디테가 나를 내 나라와 사랑하는 딸, 외모로나 지혜로나 결코 부족함이 없는 정당한 남편에게서 떼어내어 그곳으로 데려온 그 부당한 처사 때문에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그대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오. 나도 수많은 곳을 다니며 숱한 영웅들을 겪어 보았지만, 오디세우스 같은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소. 트로이인들에게 죽음과 파멸을 안겨주기 위해 아르고스의 용사들이 숨죽여 기다리던 그 목마 안에서, 그가 보여준 인내와 용기는 실로 대단했지. 그때 헬레네 당신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었지. 트로이인들을 도우려는 어떤 신이 그대를 그리로 이끌었음이 분명하오. 그때 데이포보스도 그대와 함께 있었지. 그대는 우리가 숨어 있던 곳을 세 번이나 돌며 손으로 두드려 보았고, 우리 장수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 아내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도 했소. 안에서 자리를 지키던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 그리고 나는 그대가 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지. 디오메데스와 나는 당장 밖으로 뛰쳐나갈지, 아니면 안에서 대답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소.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우리를 제지했기에 우리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지. 다만 안티클로스만은 예외였소. 그가 대답하려 입을 열자 오디세우스가 억센 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는 버텼지. 바로 그 행동이 우리 모두를 구한 셈이지. 아테나 여신이 그대를 데려갈 때까지 그가 안티클로스의 입을 막고 있었으니까.”
텔레마코스가 탄식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모든 노력도, 그 자신의 강인한 용기도 제 아버지를 구하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그만 저희를 잠자리에 들게 해 주십시오. 편안히 누워 달콤한 잠을 청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헬레네는 시녀들에게 명하여 행랑채에 있는 방에 잠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시녀들은 붉은 양탄자를 깔고 그 위에 덮개와 손님들이 걸칠 수 있는 모직 망토를 준비했다. 시녀들이 횃불을 들고 나가 잠자리를 정돈하자, 곧이어 한 시종이 손님들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리하여 텔레마코스와 피시스트라토스는 바깥뜰에서 잠을 청했고, 아트레우스의 아들 메넬라오스는 아름다운 헬레네와 함께 안쪽 방에 들었다.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메넬라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는 잘생긴 발에 샌들을 신고 어깨에 칼을 찼으며, 마치 불사의 신과 같은 위엄 있는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텔레마코스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물었다.
“텔레마코스여, 도대체 무슨 일로 라케다이몬까지 그토록 먼 바닷길을 건너온 것인가? 공적인 일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일인가? 자초지종을 내게 모두 말해 보게나.”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제 아버지에 대해 혹시 아시는 것이 있으실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저는 지금 가산이 거덜 날 지경입니다. 제 훌륭한 영지는 황폐해지고 있고, 집 안은 제 어머니께 구혼한다는 핑계로 수많은 양과 소를 도살해대는 무뢰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아버지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직접 목격하셨든 다른 여행자에게서 전해 들으셨든 상관없습니다. 아버지는 본래 고난을 타고나신 분이었으니까요. 저를 가엾게 여겨 말씀을 에둘러 하지 마시고, 보신 그대로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트로이군에게 시달리던 아카이아인들을 위해 제 용맹한 아버지 오디세우스가 말이나 행동으로 충직하게 도운 적이 있다면, 부디 그 일을 기억하시어 저를 위해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메넬라오스는 크게 놀라 외쳤다.
“그러니까 그 겁쟁이들이 용맹한 용사의 침실을 차지하려 든단 말인가? 마치 암사슴이 갓 낳은 새끼를 사자의 굴에 두고 숲이나 풀밭으로 먹이를 구하러 나간 꼴이군. 사자가 굴로 돌아오면 그 둘을 단숨에 해치워 버릴 텐데…. 오디세우스도 저 구혼자들을 그렇게 처리할 것이네. 아버지 제우스와 아테나, 아폴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만약 오디세우스가 레스보스섬에서 필로멜레이데스와 씨름하여 그를 거칠게 내동댕이쳤을 때의 그 기개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모든 아카이아인들이 그에게 환호성을 보냈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라면, 그가 구혼자들 앞에 나타나는 순간 구혼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결혼식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할 것이네. 하지만 자네가 물은 것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거나 속이지 않고 ‘바다의 노인’이 내게 들려준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말해주겠네.
나는 이곳으로 오려 했지만, 신들이 나를 이집트에 붙잡아 두었네. 내가 바친 백 마리 소의 제물(헤카톰베)이 신들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신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챙기는 데 아주 엄격하니까. 이집트 앞바다에는 순풍을 타고 배가 하루 동안 항해할 수 있는 거리쯤에 ‘파로스’라는 섬이 있네. 그곳에는 좋은 항구가 있어 배들이 식수를 채운 뒤 다시 넓은 바다로 나가는 곳이지. 하지만 신들은 그곳에서 스무 날 동안이나 바람 한 점 불지 않게 하여 내 발을 묶어두었네. 식량은 바닥나고 내 부하들은 굶어 죽을 뻔했지. 하지만 ‘바다의 노인’ 프로테우스의 딸인 여신 이도테아가 나를 가엾게 여겨 구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네. 그녀가 나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거든. 어느 날, 내가 홀로 있을 때 그녀가 내게 다가왔지. 나는 종종 혼자 있곤 했다네. 선원들은 굶주림의 고통을 면할 물고기 한두 마리라도 잡으려고 미늘 달린 낚싯바늘을 챙겨 섬 곳곳으로 나가곤 했지. 그녀가 말했지.
‘이방인이여, 당신은 이런 식으로 굶주리는 것을 즐기는 모양이군요. 적어도 별로 괴로워하는 기색은 없으니 말이에요. 부하들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도 탈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날마다 이곳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내가 대답했지.
‘그대가 어떤 여신이든 간에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내 의지로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하늘에 사는 신들의 노여움을 산 모양입니다. 그러니 내게 말해주십시오. 신들은 모든 것을 아시니까, 어떤 불사신이 이토록 나를 가로막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항해해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녀가 말했지.
‘나그네여, 모든 것을 분명히 일러드리지요. 이 근방 바닷속에 사는 늙은 불사신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프로테우스랍니다. 그는 이집트에 살며 사람들은 그를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그는 포세이돈의 우두머리 부하로서 바닷속 지형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답니다. 만약 그를 붙잡아 제압할 수만 있다면, 그는 당신에게 항해에 관해, 즉 어떤 항로를 택해야 하고 어떻게 바다를 건너야 고향에 닿을 수 있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그 길고 위험한 여정을 떠나 있는 동안 집안에서 일어난 좋고 나쁜 모든 일에 대해서도 당신이 원한다면 말해줄 것이고요.’
내가 물었지.
‘그 늙은 신이 눈치채거나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를 붙잡을 수 있는 묘책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신이란 필멸의 인간이 쉽게 붙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지.
‘나그네여, 모든 것을 분명하게 일러드리지요. 해가 중천에 이를 무렵이면 바다의 노인이 파도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때면 서풍이 불어와 그의 머리 위 바다 표면에 잔물결을 일으키지요. 물 위로 올라온 그는 거대한 바다 동굴에 자리를 잡고 잠이 듭니다. 할로시드네의 자식들이라 불리는 바다표범들도 잿빛 바다에서 올라와 그의 주변에 떼를 지어 잠을 청합니다. 녀석들은 아주 강한 비린내를 풍기며 몰려오지요. 내일 아침 일찍 당신을 그곳으로 데려가 숨어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함대에서 가장 뛰어난 부하 셋을 골라두세요. 그 노인이 부릴 온갖 술수를 내가 일러드리겠습니다.
먼저 그는 바다표범들을 모두 살펴보고 그 수를 셀 것입니다. 다섯 손가락으로 일일이 확인한 뒤에는 마치 양 떼 속의 목자처럼 그들 사이에 누워 잠이 들 겁니다.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는 즉시 덮쳐서 붙잡으세요. 온 힘을 다해 꽉 움켜쥐어야 합니다. 그가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 할 겁니다. 그는 땅 위를 다니는 온갖 짐승으로 변신할 것이고, 불이나 물로도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걸어와도 잠들었을 때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올 때까지 놓지 말고 더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본모습으로 돌아오면 손아귀의 힘을 빼고 놓아주어도 됩니다. 그때 그에게 물어보세요. 어떤 신이 당신에게 노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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