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희미한 낮 빛이 남아 있었고, 달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는 모피 깃이 달리고 강철 잠금장치로 여민 승마용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세부적인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키는 중간 정도였고 가슴이 매우 넓고 건장한 체격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얼굴은 검은빛을 띠었고, 이목구비는 엄하고 굵직했다. 짙은 눈썹 아래의 눈빛은 지금 막 불쾌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화가 나고 심기가 뒤틀려 보였다. 그는 이미 젊은 나이는 지났지만, 그렇다고 중년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아마 서른다섯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가 두렵지 않았고, 그에게 수줍음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만약 그가 잘생기고 영웅 같은 분위기의 젊은 신사였다면, 부끄러워 그렇게 서서 질문하거나 자청해서 도와주겠다고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잘생긴 젊은 남자를 거의 본 적이 없었고,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아름다움과 우아함, 기사다운 품격과 사람을 사로잡는 남성의 매력에 대해 이론적인 경외와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한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지도, 가지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불이나 번개처럼 눈부시지만 가까이할 수 없는 것들을 피하듯 그들을 피했을 것이다.
만약 이 낯선 사람이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더라면, 혹은 내 도움을 사양하며 고맙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대로 길을 떠났을 것이고 더 이상 묻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찌푸린 표정과 거친 태도는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손짓으로 가 보라고 했는데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이 늦은 시간에 이렇게 외진 길에 홀로 계신데, 말을 다시 타실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지신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떠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비로소 나를 바라보았다. 그전까지는 거의 내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가씨도 이 근처에 집이 있다면 지금쯤 집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어디서 오는 길이오?”
“바로 아래쪽에서 왔습니다. 달이 밝은 밤이라 늦게 다녀도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헤이까지 달려가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마침 편지를 부치러 가는 길이기도 하고요.”
“바로 아래쪽이라면… 저 흉벽이 있는 저택을 말하는 것이오?”
그는 달빛이 희끗하게 비추고 있는 손필드 저택을 가리켰다. 서쪽 하늘과 대비되어 숲은 하나의 거대한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고, 그 속에서 저택만이 창백하고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네, 맞습니다.”
“저 집은 누구의 집이오?”
“로체스터 씨의 집입니다.”
“로체스터 씨를 아시오?”
“아니요.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럼 지금 그 집에는 안 계신다는 말이오?”
“네.”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소?”
“모릅니다.”
“당신은 그 집 하인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그는 말을 멈추고 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평소처럼 나는 매우 수수한 차림이었다. 검은 메리노 망토에 검은 비버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어느 것 하나 하녀가 입기에도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차림이었다.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지 못해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가정 교사입니다.”
“아, 가정 교사!”
그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이런, 내가 그걸 깜빡하고 있었군! 가정 교사라….”
그는 다시 한번 내 옷차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는 울타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순간 얼굴에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을 불러오게 할 수는 없겠소. 괜찮다면 당신이 조금만 직접 도와줄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우산이 있소? 지팡이 대신 짚을 수 있게.”
“없습니다.”
“그럼 내 말의 고삐를 잡아서 이리 데려와 주시오. 무섭지는 않겠지?”
혼자였다면 말에게 가까이 가는 것조차 무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탁을 받자 기꺼이 그렇게 했다.
나는 털토시를 울타리 위에 내려놓고 커다란 말에게 다가갔다. 고삐를 잡으려 애썼지만, 그 말은 기운이 넘치는 녀석이라 내가 머리 가까이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말의 앞발에 짓밟힐까 봐 몹시 두려웠다. 그 사람은 한동안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산이 마호메트에게 올 리는 없겠군. 그렇다면 마호메트가 산으로 가도록 도와주는 수밖에 없겠소. 이리 좀 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실례하겠소. 부득이하게 당신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군.”
그는 묵직한 손을 내 어깨에 얹고 몸을 제법 기대며 절뚝절뚝 말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고삐를 손에 넣자마자 그는 단숨에 말을 제어했고, 곧 안장 위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 순간 삔 발목이 크게 비틀리는 바람에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자!”
그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다가 놓으며 말했다.
“이제 내 채찍만 좀 건네주시오. 저기 울타리 밑에 떨어져 있소.”
나는 채찍을 발견해 건네주었다.
“고맙소. 이제 얼른 헤이에 가서 편지를 부치고,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시오.”
그가 박차를 살짝 가하자 말은 앞발을 번쩍 들며 몸을 치켜세웠다가 곧 힘차게 달려 나갔다. 커다란 개도 그의 뒤를 따라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야의 들풀을 거센 바람이 휘몰아 날려 보내듯이.
나는 털토시를 집어 들고 다시 길을 걸었다.
내게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의미에서는 특별할 것도, 낭만적일 것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롭기만 했던 내 삶의 단 한 시간을 분명히 바꾸어 놓았다.
누군가 내게 도움을 청했고, 나는 도움을 주었다.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비록 사소하고도 잠깐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능동적인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도 수동적으로만 흘러가는 삶에 지쳐 있었다.
그 낯선 사람의 얼굴 또한 내 기억의 화랑에 새로 걸린 한 폭의 그림처럼 남았다. 그리고 그 그림은 그곳에 걸려 있던 다른 어떤 얼굴과도 달랐다. 첫째, 남자였고, 둘째, 어둡고 강인하며 엄격한 인상을 지닌 얼굴이었다.
헤이에 들어가 우체국에 편지를 넣을 때에도 그 얼굴은 여전히 내 눈앞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리막길을 빠르게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그 울타리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며 귀를 기울였다. 혹시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망토를 걸친 기수와 가이트래시를 닮은 뉴펀들랜드 개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달빛을 받아 꼿꼿이 서 있는 산울타리와 가지를 잘라낸 버드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1마일쯤 떨어진 손필드 주변 숲을 스치며 이따금 불어오는 아주 희미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택 정면 창문 하나에 불빛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내가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손필드로 다시 들어가는 내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다시 정체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고요한 홀을 지나 어두운 계단을 오르고, 작고 외로운 내 방으로 들어간 뒤, 온화한 페어팩스 부인을 만나 긴 겨울 저녁을 오직 그녀와 둘이 보내야 했다. 그것은 조금 전 있었던 신선한 흥분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일이었다. 획일적이고 지나치게 고요한, 보이지 않는 삶의 족쇄를 다시 내 정신과 능력 위에 씌우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점점 안전하고 편안한 삶의 특권조차 감사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무렵의 나에게는, 차라리 불확실하고 고된 삶의 폭풍 속으로 내던져져 거칠고 쓰라린 경험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지금 내가 싫증 내고 있는 이 평온을 그리워하게 되는 편이 더 유익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것은 지나치게 편안한 안락의자에 오래 앉아 지친 사람이 긴 산책을 하고 싶어지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의 내 처지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싶고 변화를 갈망했던 마음 역시 그랬다.
나는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잔디밭에서도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현관 앞 포장길을 이리저리 오가며 맴돌았다. 유리문 덧문은 이미 닫혀 있었기에 집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 눈과 마음은 그 음침한 저택에서,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방들로 가득 찬 잿빛 빈 공간처럼 느껴지던 그곳에서, 자꾸만 앞에 펼쳐진 하늘로 이끌려 갔다.
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씻긴 푸른 바다 같았다. 달은 엄숙하게 천천히 하늘을 오르고 있었다. 언덕 너머에서 떠오른 달은 점점 더 높이, 더 멀리 올라가며, 끝없이 깊고 헤아릴 수 없이 먼 자정의 하늘 한가운데를 향해 나아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떨리듯 반짝이는 별들이 이어졌다.
나는 그 별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떨렸고, 피가 뜨겁게 흐르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때 사소한 것 하나가 다시 현실로 나를 불러들였다. 마침 저택 안의 시계가 종을 쳤다. 그 소리 하나면 충분했다. 나는 달과 별에서 시선을 거두고 옆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홀은 완전히 어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다. 높은 곳에 걸린 청동 램프의 희미한 불빛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홀과 참나무 계단 아래쪽은 따뜻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빛은 활짝 열린 식당의 양쪽 문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불빛은 대리석 난로와 놋쇠 화로 도구들을 반짝이게 했다. 보랏빛 커튼과 윤이 나는 가구들도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 드러나 보였다.
벽난로 근처에는 사람들도 모여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얼핏 스쳐 지나며 보았을 뿐이었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도 잠깐 들렸는데, 그중에는 아델의 목소리도 섞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제대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식당 문은 닫혀 버렸다.
서둘러 페어팩스 부인의 방으로 갔다. 그 방에도 벽난로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지만, 촛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정작 페어팩스 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방 안에는 검은색과 흰색의 긴 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홀로 벽난로 앞 양탄자 위에 꼿꼿이 앉아 불길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길에서 보았던 가이트래시를 닮은 그 개였다. 너무도 똑같이 생겨 다가가며 말했다.
“파일럿!”
그러자 그 개는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았다.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녀석은 커다란 꼬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혼자 마주하고 있기에는 어딘지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개였다. 어디서 온 녀석인지도 알 수 없었다.
촛불이 필요했다. 이 낯선 손님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리아가 들어왔다.
“이 개는 누구의 개인가요?”
“주인님과 함께 왔어요.”
“주인님이요?”
“네, 주인님이요. 로체스터 씨께서 방금 도착하셨어요.”
“정말요? 그럼 페어팩스 부인도 함께 계신가요?”
“네. 아델 양도 함께 식당에 있어요. 그리고 존은 외과 의사를 부르러 갔어요. 주인님께서 사고를 당하셨거든요. 말이 넘어져 발목을 삐셨어요.”
“혹시 헤이로 가는 길에서 말이 넘어진 건가요?”
“네. 내리막길에서 얼음 때문에 미끄러졌어요.”
“아… 그렇군요. 리아, 촛불 하나 가져다줄래요?”
리아는 촛불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페어팩스 부인도 들어왔다.
부인은 방금 들은 소식을 다시 전해 주면서, 카터 외과 의사가 이미 도착해 지금 로체스터 씨를 진료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내 부인은 차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 서둘러 방을 나갔고, 나는 겉옷을 벗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교정 후기
자기가 로체스터라고 밝히지도 않고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의뭉스럽기는 하지만, 로체스터는 속으로는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자기 집의 가정 교사라니... 아무튼 둘의 만남은 그 자체로 설렙니다.
만약 그가 잘생기고 영웅적으로 보이는 젊은 신사였다면, 나는 감히 이렇게 서서 그의 의사에 반해 질문을 던지고 요청하지도 않은 호의를 제공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 만약 그가 잘생기고 영웅 같은 분위기의 젊은 신사였다면, 부끄러워 그렇게 서서 질문하거나 자청해서 도와주겠다고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름다음, 우아함, 정중함, 매혹에 대해 이론적인 경외와 존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남성의 형상으로 구체화된 그러한 특성들을 만났다면 그것들이 내 안의 그 무엇과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으며 형성할 수도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 아름다움과 우아함, 기사다운 품격과 사람을 사로잡는 남성의 매력에 대해 이론적인 경외와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한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지도, 가지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건은 일어났고 내게서 사라졌다.
▶ 내게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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