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지러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페어팩스 부인이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 오전 수업은 이제 끝난 것 같군요.” 부인이 말했다.
부인은 양쪽 접이문이 활짝 열려 있는 방 안에 있었다. 나는 부인이 부르자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넓고 위엄 있는 방이었다. 보랏빛 의자와 커튼이 놓여 있었고, 터키산 카펫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벽은 호두나무 판재로 마감되어 있었으며, 거대한 창문 하나에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끼워져 있었다. 높다란 천장은 정교한 몰딩으로 장식되어 있어 한층 더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페어팩스 부인은 곁탁자 위에 놓인 자줏빛 형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꽃병들의 먼지를 털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방이네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토록 웅장한 방은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요. 여기가 식당이에요. 방 안에 공기와 햇빛이 조금이라도 더 들어오게 하려고 방금 창문을 열었답니다.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방은 금세 눅눅해지거든요. 저쪽 응접실은 거의 지하 묘실 같다니까요.”
부인은 창문과 마주 보는 넓은 아치를 가리켰다. 그곳에도 창문처럼 보랏빛으로 물들인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걷혀 있었다.
나는 넓은 두 계단을 올라 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처음 보는 내 눈에는 마치 요정들의 궁전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곳은 그저 아주 예쁜 응접실과 그 안쪽에 딸린 작은 방일뿐이었다.
두 방 모두 흰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마치 그 위에 화려한 꽃다발이 흩뿌려져 있는 것 같았다. 천장에는 하얀 포도송이와 포도잎 모양의 석고 장식이 새하얗게 둘러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선명한 진홍색 소파와 오토만 의자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놓여 있었다.
옅은 색의 파리안 대리석★ 벽난로 선반 위에는 루비처럼 붉게 빛나는 보헤미아 유리 장식품들이 반짝였고, 창문 사이에 놓인 커다란 거울들은 새하얀 장식과 붉은 가구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거듭 비추고 있었다.
“정말 빈틈없이 관리하고 계시는군요, 페어팩스 부인. 먼지도 하나 없고, 가구를 덮어 두는 천도 없네요. 공기가 조금 차갑다는 것만 빼면, 매일 사람이 생활하는 방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글쎄요, 에어 선생님. 로체스터 씨는 이곳에 자주 오시지는 않지만, 오실 때는 늘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오시거든요. 예전에 방마다 덮개를 씌워 두고 있다가 그분이 도착한 뒤에 허둥지둥 정리하는 모습을 무척 못마땅해하시는 것을 보고는, 차라리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해 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답니다.”
“로체스터 씨는 세세한 것까지 따지는 분인가요?”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분은 아니에요. 다만 신사다운 취향과 생활 방식을 가진 분이라 그에 맞게 집안이 관리되기를 바라실 뿐이지요.”
“부인께서는 그분을 좋아하시나요?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좋은 편인가요?”
“그럼요. 로체스터 가문은 이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존경받아 왔답니다. 저기 보이는 땅 대부분이 예부터 모두 로체스터 가문의 소유였으니까요.”
“토지와 상관없이 그분은 어떤가요? 사람들은 그분을 좋아하나요?”
“나는 그분을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또 소작인들도 그분을 공정하고 너그러운 지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만 그분은 이곳에서 오래 지내신 적이 거의 없어서 주민들과 가까이 지낼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그분에게 특별한 성격 같은 건 없나요? 한마디로 어떤 분인가요?”
“글쎄요. 성품은 흠잡을 데 없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조금 독특한 면은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여행을 아주 많이 다니셨고 세상 경험도 풍부하신 분이에요. 분명 총명한 분이시겠지만, 나는 그분과 긴 대화를 나눠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잘은 모르겠어요.”
“어떤 점이 독특하다는 건가요?”
“그걸 설명하기는 쉽지 않네요. 아주 눈에 띄는 특징은 아닌데, 막상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느껴져요. 그분이 농담하는 건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기분이 좋은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늘 확신하기가 어렵거든요. 한마디로 말해 그분을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적어도 나는 그래요. 하지만 그게 무슨 큰 문제겠어요? 아주 좋은 주인이신걸요.”
페어팩스 부인에게서 들은 로체스터 씨, 곧 우리의 고용주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였다.
세상에는 사람이나 사물의 특징을 관찰하고 핵심을 포착하여 묘사하는 데 별다른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착한 페어팩스 부인은 분명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내 질문은 부인을 난처하게 만들 뿐,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부인에게 로체스터 씨는 그저 로체스터 씨일 뿐이었다. 신사이며 대지주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었다. 부인은 그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내가 그의 인물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이유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식당을 나온 뒤, 페어팩스 부인은 집 안의 나머지 곳도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녀를 따라 위층과 아래층을 오가며 둘러보았는데, 가는 곳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 안은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품위 있게 꾸며져 있었다.
특히 정면에 있는 넓은 침실들은 무척 웅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3층의 몇몇 방은 어둡고 천장이 낮았지만, 오래된 세월의 분위기가 배어 있어 오히려 더 흥미로웠다.
유행이 바뀔 때마다 아래층에서 쓰던 가구들이 차례차례 이곳으로 옮겨져 왔던 모양이었다. 좁은 미닫이창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은 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침대들을 비추고 있었다. 참나무나 호두나무로 만든 커다란 궤들은 종려나무 가지와 천사의 얼굴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히브리인의 언약궤를 연상시켰다.
높고 좁은 등받이를 가진 오래된 의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보다도 더 오래된 작은 의자들의 방석 위에는 오래전에 희미해진 자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자수는 이미 두 세대 전부터 무덤 속 먼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손수 놓았던 것이다.
이런 오래된 유물들은, 손필드 저택의 3층 전체를 마치 과거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공간처럼 만들어 주었다. 그곳은 추억을 모셔 둔 성소 같았다.
낮 동안에는 그 적막함과 어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밤에는 그 무겁고 넓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떤 침대는 참나무 문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고, 또 어떤 침대는 두껍게 수놓은 오래된 영국식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휘장에는 기이한 꽃과 더욱 기이한 새들, 무엇보다도 이상한 사람들의 모습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그것은 창백한 달빛 아래에서는 틀림없이 섬뜩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인들은 이 방들에서 자나요?” 내가 물었다.
“아니에요. 하인들은 뒤쪽에 있는 작은 방들을 써요. 이곳에서는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아요. 어쩌면 손필드 저택에 유령이 있다면 바로 이곳을 서성일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정말 유령은 없는 건가요?”
“적어도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어요.”
페어팩스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도 없나요? 유령 이야기 같은 것도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로체스터 가문은 예부터 온화하기보다는 다혈질인 사람들이 많았다고들 하죠. 어쩌면 그래서인지 이제는 모두 무덤 속에서 평안히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맞아요. 인생의 덧없는 열병이 끝난 뒤에는 편히 잠드는 법이죠.”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페어팩스 부인?”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에 물었다.
“옥상으로요. 거기서 보이는 경치를 구경하시겠어요?”
나는 다시 부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아주 좁은 계단을 따라 다락층으로 올라갔고, 거기에서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의 덧문을 지나 마침내 저택의 지붕 위에 섰다.
나는 어느새 까마귀 떼가 둥지를 튼 높이와 같은 곳에 올라와 있었고, 둥지 안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흉벽 너머로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택의 부지가 마치 한 장의 지도처럼 한눈에 펼쳐졌다. 회색 저택의 기단을 벨벳처럼 부드럽고 선명한 초록빛 잔디밭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고, 공원만큼 넓은 들판에는 오래된 거목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숲은 갈색으로 시들어 있었으며, 그 사이를 가르는 길은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이끼가 무성하게 덮여 있었다. 나뭇잎보다 이끼가 더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
정문 가까이에 있는 교회와 길, 고요한 언덕들도 보였다. 모든 것이 가을날의 햇살 아래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듯했다. 지평선은 맑고 아름다운 하늘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푸른 하늘에는 진주빛 흰 구름이 대리석 무늬처럼 퍼져 있었다. 그 풍경 속에는 특별히 눈길을 끄는 장관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나는 한참 동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다시 덧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방금까지 올려다보던 푸른 하늘과 숲과 목초지, 푸른 언덕이 햇빛에 빛나던 풍경에 비하면 다락은 마치 지하 무덤처럼 캄캄하게 느껴졌다.
손필드 저택을 중심으로 펼쳐진 그 평화로운 풍경은 내가 넋을 놓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페어팩스 부인은 덧문을 잠그기 위해 잠시 뒤에 남았고, 나는 더듬더듬 다락의 출구를 찾아 좁은 다락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3층 앞쪽 방과 뒤쪽 방을 가르는 긴 복도로 이어졌다. 그 복도는 좁고 천장이 낮았으며 어둑어둑했다. 맨 끝에 작은 창문 하나만 있을 뿐이었고, 양옆으로 늘어선 작은 검은 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푸른 수염의 성에 있는 음산한 복도를 연상시켰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처럼 적막한 곳에서는 절대 들릴 리 없다고 생각했던 소리, 웃음소리가 갑자기 귀에 들려왔다.
그 웃음은 매우 이상했다.
또렷했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듯 형식적이었고, 조금도 즐거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웃음은 잠시 멎는가 싶더니 곧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처음에도 분명하게 들렸지만 매우 낮은 소리였다. 이윽고 그 웃음은 요란한 폭소로 터져 나와, 마치 외딴 방마다 메아리를 깨우는 듯 울려 퍼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단 하나의 방에서만 들려오는 소리였는데, 어느 문 너머에서 그 웃음이 새어 나오는지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페어팩스 부인!”
나는 부인이 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불렀다.
“방금 저 큰 웃음소리 들으셨어요? 누구죠?”
“아마 하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겠지요.”
부인이 대답했다.
“아마 그레이스 풀일 거예요.”
“정말 들으셨어요?”
나는 다시 물었다.
“네, 분명히 들었어요. 나는 자주 듣는답니다. 그레이스는 이 방들 가운데 하나에 들어가 바느질을 하거든요. 가끔은 리아도 함께 있고, 둘이 같이 있으면 종종 시끄러워져요.”
그 웃음은 다시 들려왔다.
낮고 또박또박 끊어지는 소리였고, 마지막에는 기이한 중얼거림으로 끝이 났다.
“그레이스!”
페어팩스 부인이 소리쳤다.
솔직히 나는 그레이스라는 사람이 대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웃음은 내가 이제껏 들어 본 어떤 웃음보다도 비극적이었고,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섬뜩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낮이 아니었거나, 그 기묘한 웃음소리와 함께 유령이라도 나올 법한 분위기였다면, 혹은 장소와 시간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면 나는 미신을 믿는 사람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사실이 드러나 내가 품었던 두려움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내게서 가장 가까운 문이 열리더니 하녀 한 사람이 나왔다. 나이는 서른에서 마흔 사이쯤 되어 보였다. 체격은 다부지고 네모반듯했으며, 붉은 머리에 투박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유령과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레이스, 너무 시끄럽군요.”
페어팩스 부인이 말했다.
“내가 한 말을 잊지 말아요.”
그레이스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몸을 숙여 인사한 뒤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저 사람은 바느질도 하고, 리아의 집안일도 거드는 사람이에요.”
페어팩스 부인이 설명을 이어 갔다.
“흠이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맡은 일은 그런대로 잘 해낸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새 제자와는 잘 지냈나요?”
화제가 아델에게로 옮겨졌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아래층의 밝고 아늑한 공간으로 내려왔다.
현관에서는 아델이 달려와 우리를 맞으며 외쳤다.
“마담, 부 제트 세르비!(부인들, 식사가 준비됐어요!)”
그러고는 곧 덧붙였다.
“제 비앙 뼁, 무아!(저는 정말 배고파요!)”
우리는 페어팩스 부인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점심 식사가 이미 차려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안 대리석: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최고급 조각용 소재로 극찬받았던 눈부시게 하얗고 투명한 고급 대리석
교정 후기
다시 읽어보니 어려운 문장들이 있고, 잘못된 단어도 들어 있어서 다시 수정해 봅니다.
정문 곁의 교회와 길, 고요한 언덕들은 모두 가을 햇살 아래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고, 멀리 수평선은 진주빛 흰 구름이 대리석 무늬처럼 흩어진 맑고 푸른 하늘로 부드럽게 둘러싸여 있었다.
▶ 정문 가까이에 있는 교회와 길, 고요한 언덕들도 보였다. 모든 것이 가을날의 햇살 아래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듯했다. 지평선은 맑고 아름다운 하늘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푸른 하늘에는 진주빛 흰 구름이 대리석 무늬처럼 퍼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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