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번역하고 교정 전문가가 다듬은 쉬운 고전 시리즈 1 제인 에어 3장>
로이드 씨와의 만남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마치 끔찍한 악몽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을 차린 순간이었다. 눈앞에는 무시무시한 붉은 빛이 번져 있었고, 그 위로 굵고 검은색 막대 같은 그림자가 가로질러 보였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마치 바람이나 물소리에 가려진 듯 희미하고 울림이 섞여 있었다. 불안과 혼란, 무엇보다 극심한 공포가 내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나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람은 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히고 받쳐주었다. 지금껏 누구도 나를 그렇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안아 올리거나 부축해 준 적은 없었다. 나는 베개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팔인지 모를 곳에 머리를 기댔고,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5분쯤 더 지나자 머릿속을 뒤덮고 있던 혼란이 걷혀 갔다. 내가 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과, 눈앞의 붉은빛이 내 방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밤이었다.
탁자 위에는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고, 베시는 대야를 손에 든 채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맡 가까이에는 한 신사가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방 안에 낯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신사는 게이츠헤드 저택 사람이 아니었고, 리드 부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보호받고 있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어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베시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 신사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로이드 씨였다. 약제사였던 그는 하인들이 아플 때면 리드 부인의 부름을 받고 종종 이 집을 찾았다. 리드 부인 자신과 아이들은 따로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았지만, 하인들은 로이드 씨가 돌보곤 했다.
“자, 내가 누구인지 알겠니?”
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곧 괜찮아질 거야.”
그는 나를 다시 조심스럽게 눕힌 뒤, 베시를 향해 밤새 내가 방해받지 않도록 각별히 살피라고 당부했다. 몇 가지 더 지시를 내리고 다음 날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그는 방을 나갔다. 그가 떠나는 것이 나는 몹시 슬펐다. 로이드 씨가 머리맡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든든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문이 닫히는 순간 방 안은 한층 더 어두워진 것 같았고, 내 마음도 다시 깊이 가라앉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아가씨, 잠이 올 것 같아요?”
베시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 다음 말은 다시 차갑고 매서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노력할게.”
“뭐라도 마시겠어요? 아니면 뭐라도 조금 드실래요?”
“아니, 괜찮아. 고마워, 베시.”
“그럼 전 이제 자러 가야겠어요. 벌써 열두 시가 넘었거든요. 하지만 밤중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이토록 친절한 베시라니! 그 다정한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베시,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아팠던 거야?”
“붉은 방에서 너무 울다가 기절했나 봐요.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예요.”
그리고는 베시가 가까운 하녀 방으로 들어갔다. 베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라, 오늘 밤은 이 방에서 나랑 같이 자 줘. 난 오늘 밤 저 불쌍한 아이와 단둘이 있을 엄두가 안 나. 혹시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저렇게 발작을 일으키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뭘 본 건 아닐까? 마님이 너무 심하게 하신 것 같아.”
베시와 사라는 함께 돌아왔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은 잠들기 전까지 거의 30분 동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띄엄띄엄 들려오는 말들을 주워들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사라졌대.”
“그 뒤에는 커다란 검은 개가 따라왔고.”
“방문을 세 번 크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대.”
“교회 묘지, 바로 그분 무덤 위에서 빛이 번쩍였다는 거야.”
…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도 잠이 들었고, 벽난로의 불도 촛불도 모두 꺼졌다. 그러나 나는 그 길고 오싹한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귀도, 눈도, 마음도 모두 공포에 곤두서 있었다. 그것은 어른은 결코 느낄 수 없고 어린아이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붉은 방 사건 이후 병을 앓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일은 내게 깊은 충격을 남겼고, 그 충격이 지금까지도 느껴지곤 한다.
‘그래요, 리드 부인. 내가 평생 겪어 온 두려운 정신적 고통 가운데 일부는 분명 당신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당신은 내 마음의 줄을 하나하나 끊어 놓으면서도 그저 내 나쁜 기질을 바로잡고 있다고만 믿고 있었죠.’
다음 날 정오 무렵 나는 옷을 입고 일어나 숄을 두른 채 방 벽난로 곁에 앉아 있었다. 몸은 몹시 쇠약했고 기운도 없었다. 그러나 육체의 허약함보다 더 심한 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비참함이었다. 그것 때문에 말없이 계속 눈물을 흘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 일이 사실이라면 나는 행복해야 했다. 리드가 가족 모두 리드 부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외출했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벗도 다른 방에서 바느질하고, 베시는 장난감을 치우고 서랍을 정리하느라 이리저리 오가면서도 평소와는 달리 가끔씩 다정한 말을 건네주었다. 늘 꾸중과 잔심부름에 시달리던 나에게 이런 하루는 평화로운 낙원처럼 느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지난밤 너무 놀라 아무리 평온한 환경도 위로가 되지 못했고 어떤 즐거움도 나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베시는 부엌에서 올라오며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도자기 접시 하나를 가져왔다. 그 접시에는 나팔꽃과 장미 꽃봉오리 화환 속에 앉아 있는 극락조 한 마리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탄에 빠지곤 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고 싶어 여러 번 그 접시를 만져보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지금까지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접시가 이제는 내 무릎 위에 올려졌고, 베시는 그 위에 담긴 부드러운 타르트를 맛있게 먹으라고 진심으로 권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바라던 선물들이 흔히 그렇듯, 너무 늦은 호의였다. 나는 타르트를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극락조의 화려한 깃털도, 꽃들의 아름다운 색채도 전보다 훨씬 빛이 바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접시와 타르트를 조용히 밀쳤다. 베시는 책을 읽겠느냐고 물었다. ‘책’이라는 말은 잠시나마 내 마음에 작은 생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서재에 있는 《걸리버 여행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책은 내가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던 가장 좋아하는 책이었다. 나는 걸리버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고 믿었다. 그래서 요정 이야기보다 훨씬 더 깊은 흥미를 느꼈다.
요정들은 여우장갑꽃 속에서도, 은방울꽃 아래에서도, 버섯 밑에서도, 담쟁이덩굴이 뒤덮은 오래된 담벼락 틈에서도 아무리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슬프지만 그들이 모두 잉글랜드를 떠나 숲이 훨씬 더 울창하고 사람은 훨씬 적은 머나먼 미개한 나라로 가 버렸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릴리펏(소인국)과 브롭딩낵(거인국)만큼은 달랐다. 내게 그곳은 분명히 지구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였다.
언젠가 먼 항해를 떠난다면 나는 직접 그곳에 가서 작은 들판과 집들, 나무들, 손바닥만 한 사람들과 조그마한 소와 양, 작은 새들이 살아가는 릴리펏을 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숲처럼 높이 자란 밀밭과 거대한 마스티프 개들, 괴물 같은 고양이들, 탑처럼 우뚝 솟은 남자와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토록 아끼던 책이 내 손에 들려 있었음에도, 책장을 넘기며 예전 같으면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을 신비로운 삽화들을 바라보았음에도, 모든 것이 음산하고 스산하게만 느껴졌다. 거인들은 앙상한 괴물로 변해 있었고, 소인들은 사악하고 두려운 도깨비처럼 보였다. 걸리버는 경이로운 탐험가가 아니라 가장 두렵고 위험한, 세상을 홀로 떠도는 너무나도 외롭고 불쌍한 방랑자로만 보였다. 나는 더 이상 그 책을 읽고 싶지가 않았다. 조용히 책을 덮어 손도 대지 않은 타르트 옆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베시는 어느새 방 청소와 정리를 모두 마쳤다. 손을 깨끗이 씻은 뒤에는 작은 서랍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비단과 공단 조각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들을 꺼내 조지애나의 인형에게 씌워 줄 새 보닛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베시는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집시처럼 떠돌아다니던 그 시절,
아주 오래전 일이었지.
나는 그 노래를 전에도 여러 번 들어 본 적이 있었고, 들을 때마다 무척 즐거워하곤 했다. 베시의 목소리는 참 고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하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선율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일에 정신이 팔릴 때면 베시는 후렴구를 아주 낮고 길게 늘여 불렀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지….
그 마지막 구절은 마치 장송가의 가장 슬픈 가락처럼 내 귀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베시는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애처롭고 슬픈 노래였다.
발은 아프고 팔다리는 지쳤네
갈 길은 멀고 산들은 험하기만 하네
머지않아 달 없는 음산한 황혼이
가난한 고아의 길 위에 내려앉겠지
어째서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멀고 외로운 곳으로 보냈을까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지고 잿빛 바위만 쌓인 이곳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차갑고
오직 다정한 천사들만이
가난한 고아의 발걸음을 지켜 주네
그래도 멀리서 밤바람은 부드럽게 불어오고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이 별들이 온화하게 빛나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고아에게
보호와 위로, 그리고 희망을 베풀어 주시네
비록 부서진 다리를 건너다 넘어질지라도
늪지에서 도깨비불에 속아 길을 잃을지라도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약속과 축복으로
가난한 고아를 품에 안아 주시리
나를 강하게 해 주는 한 가지 생각이 있으니
비록 집도 친척도 모두 잃었다 해도
하늘은 영원한 나의 집이며
그곳에는 참된 안식이 기다리고 있네
하나님은 가난한 고아의 영원한 친구이시니
노래를 마친 베시가 말했다.
“제인 아가씨, 이제 울지 말아요.”
하지만 그 말은 활활 타오르는 불더러 “이제 그만 타렴.” 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얼마나 병적으로 깊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지 베시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날 오전, 로이드 씨가 다시 찾아왔다.
“벌써 일어났군.”
그는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래, 베시! 아이 상태는 어떤가?”
베시는 내가 아주 많이 좋아졌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얼굴도 좀 더 밝아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아 보이는군.”
그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보렴, 이름이 제인이라고 했지?”
“네, 선생님. 제인 에어입니다.”
“그래, 제인 에어.”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었구나. 무슨 일 때문인지 말해 줄 수 있겠니? 어디 아픈 데라도 있니?”
“아니요, 선생님.”
그러자 베시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아마 마님을 따라 마차를 타고 나가지 못해서 우는 걸 거예요.”
“설마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 그런 투정을 부리기에는 너무 컸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른 말을 들은 탓에 기분이 상한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전 평생 그런 일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마차 타고 나가는 것도 싫어해요. 제가 우는 건… 너무 불행하기 때문이에요.”
“어머나, 제인 아가씨!”
베시가 나무라듯 말했다.
착한 약제사인 로이드 씨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로이드 씨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나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작고 회색이었다. 특별히 빛나는 눈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 눈빛이 매우 예리하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이었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각진 편이었지만, 엄격하기보다는 선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를 천천히 살펴본 뒤 그가 물었다.
“어제 왜 그렇게 아프게 된 거지?”
“넘어졌거든요.”
베시가 또다시 끼어들어 대답했다.
“넘어졌다고? 그건 너무 어린애 같은 소리구나. 이만한 나이에 제대로 걷지도 못한단 말이니?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은 되었을 텐데.”
또다시 상한 기분이 나를 떠밀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넘어진 게 아니라 밀쳐져 쓰러진 거예요.”
그리고 로이드 씨가 코담배를 한 꼬집 집어 드는 동안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픈 건 아니었어요.”
그가 코담배 상자를 조끼 주머니에 넣으려던 순간, 하인들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크게 울렸다. 그는 무슨 종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베시, 밥 먹을 시간이군. 내려가서 식사하게. 돌아올 때까지 내가 제인 아가씨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있을 테니.”
베시는 남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이츠헤드 저택에서는 식사 시간 엄수가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다.
베시가 나가자 로이드 씨는 다시 물었다.
“넘어진 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팠던 거지?”
“유령이 있는 방에 해가 질 때까지 혼자 갇혀 있었어요.”
로이드 씨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유령이라고? 아직 애기였구나. 유령이 무서운 거니?”
“리드 씨의 유령은 무서워요. 그분은 그 방에서 돌아가셨고, 시신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베시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밤에는 될 수 있으면 그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데도 저를 촛불 하나 없이 혼자 가둬 두었어요. 너무 잔인했어요. 전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말도 안 돼. 그래서 그렇게 괴로운 거니? 지금 대낮인데 그래도 무섭니?”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요. 하지만 곧 또 밤이 올 거예요. 그리고… 그것 말고도 저는 불행해요. 아주 많이 불행해요.”
“무엇 때문에 그렇지? 말해 줄 수 있겠니?”
나는 그 질문에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을 만드는 일은 너무나 어려웠다.
아이들도 분명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분석할 줄은 모른다. 설령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그 이유를 깨닫는다 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슬픔을 털어놓을 수 있는 첫 번째이자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비록 빈약하지만 적어도 사실이 담긴 대답을 가까스로 입 밖으로 꺼냈다.
“우선… 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어요. 형제자매도 없고요.”
“하지만 다정한 외숙모와 이종사촌들이 있잖니?”
나는 다시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이었다.
“존 리드가 저를 밀쳐 넘어뜨렸고, 외숙모는 저를 붉은 방에 가둬 두셨어요.”
로이드 씨는 다시 코담배 상자를 꺼냈다.
“게이츠헤드 저택은 아주 아름다운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이렇게 훌륭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단다.”
그가 말했다.
“이곳은 제 집이 아니에요, 선생님. 애벗은 제가 하인보다도 이 집에 있을 권리가 없다고 말했어요.”
“허허! 설마 이런 훌륭한 집을 떠나고 싶다는 건 아니겠지?”
“갈 곳만 있다면 기꺼이 떠나고 싶어요. 하지만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게이츠헤드를 떠날 수 없어요.”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지. 누가 알겠니? 리드 부인 말고 다른 친척은 없니?”
“없는 것 같아요.”
“아버지 쪽 친척은?”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외숙모님께 물어본 적이 있는데, '에어'라는 성을 가진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친척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만약 정말 그런 친척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니?”
나는 잠시 생각했다. 가난은 어른들에게도 암울한 것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 아이들은 성실하게 일하며 품위를 지키는 가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가난이라는 말을 들으면 낡은 옷, 부족한 음식, 불이 꺼진 벽난로, 거친 말씨와 남루한 생활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가난은 곧 비천함과 같은 뜻이었다.
“아니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대답했다.
“그 사람들이 너에게 친절하게 대해 준다고 해도?”
로이드 씨가 다시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처럼 말하는 법을 배우고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익히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자라야 한다는 것도 싫었다. 나는 게이츠헤드 마을 오두막 앞에서 아이를 안고 있거나 빨래하는 가난한 여인들을 본 적이 있었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면…. 아니,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신분을 포기할 만큼 용감한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가난한 친척들일까?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말이니?”
“잘 모르겠어요. 리드 부인은 만약 친척이 있다면 틀림없이 거지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구걸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학교에 가고 싶니?”
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학교가 어떤 곳인지 나는 거의 알지 못했다.
베시는 가끔 학교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그녀 말에 따르면 학교란 어린 숙녀들이 벌받는 틀에 서기도 하고, 등을 곧게 펴기 위해 등받이 교정판을 착용하기도 하며, 언제나 매우 우아하고 단정하게 행동해야 하는 곳이었다.
존 리드는 자기 학교를 몹시 싫어했고, 선생님을 욕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존 리드가 싫어한다고 해서 나도 싫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베시가 전에 일하던 집의 아가씨들에게서 들은 학교 규율 이야기는 조금 무섭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들려주는 다른 이야기들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 아가씨들은 아름다운 풍경화와 꽃 그림을 그릴 줄 알았고, 노래도 잘 불렀으며, 악기도 연주하고, 그물뜨기로 예쁜 지갑도 만들 수 있었다. 프랑스어 책을 번역할 줄도 안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게다가 학교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의미했다. 그곳에 간다는 것은 먼 길을 떠나는 일이었고, 게이츠헤드와 완전히 헤어지는 것이며, 전혀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했다.
“정말 학교에 가고 싶어요.”
그것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마침내 입 밖으로 내놓은 결론이었다.
“그래그래,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지.”
로이드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이 아이는 환경을 바꿔 줄 필요가 있겠군. 공기도 바꾸고 새로운 곳으로 보내야 해. 신경 상태가 좋지 않아.”
바로 그때 베시가 돌아왔고, 동시에 마차가 자갈길을 따라 저택 앞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베시, 저분이 당신 주인인가? 가기 전에 잠깐 말씀을 나누고 싶군.”
베시는 그를 아침 식사실로 안내하기 위해 먼저 앞장서 나갔다.
그 뒤 로이드 씨와 리드 부인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나는 직접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일어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로이드 씨는 분명 나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안은 리드 부인에게도 아주 반가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얼마 후 어느 날 밤, 내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때, 베시와 애벗이 내가 잠든 줄로만 알고 바느질하며 나눈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애벗이 베시에게 말했다.
“마님도 저런 성가시고 버릇없는 아이를 내보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뻐하셨겠어? 저 아이는 늘 사람들을 몰래 지켜보다가 뒤에서 음모를 꾸밀 것처럼 생겼잖아.”
애벗은 나를 마치 어린 가이 포크스★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애벗이 베시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내 아버지는 가난한 성직자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와 결혼했다. 친척들은 그 결혼이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외할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뜻을 거역한 데 크게 화가 나서 단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은 채 집안에서 내쫓았다고 했다.
결혼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자신이 부목사로 일하던 큰 공업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심방하다가 장티푸스에 감염되었다. 당시 그곳에는 그 병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서 병이 옮았고, 두 사람은 한 달도 채 차이를 두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베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불쌍한 제인 아가씨, 너무 딱해요.”
애벗이 대답했다.
“그래, 만약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면 부모 잃은 처지가 안쓰럽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런 두꺼비 같은 아이에게는 정말 동정심이 생기지 않아.”
“그건 맞아.”
베시도 동의했다.
“같은 처지라도 조지애나 아가씨처럼 예쁜 아이였다면 훨씬 마음이 쓰였을 거야.”
“난 조지애나 아가씨가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
애벗이 몸짓으로 사랑스러움을 표현했다.
“긴 곱슬머리에 파란 눈, 게다가 그 고운 피부 좀 봐. 마치 그림 속 아이 같잖아!”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돌렸다.
“베시, 오늘 저녁엔 웰시 레어빗이 먹고 싶네.”
“나도요, 구운 양파까지 곁들이면 더 좋겠죠?”
베시가 웃으며 말했다.
“자, 내려가자.”
두 사람은 함께 방을 나갔다.
★ 가이 포크스(Guy Fawkes) : 1605년 영국에서 국회의사당을 폭파해 왕을 암살하려 했던 '화약 음모 사건'의 핵심 인물(실존 인물)
교정 후기
부모도 없고 사방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만 가득하다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예쁜 짓을 할 수 있을까요? 가시를 세우고 고집을 부리고 찌푸린 얼굴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베시와 애벗은 어른도 하기 어려운 일을 어린아이에게서 바라고 있네요. 아무도 제인 에어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따뜻한 마음으로 제인 에어의 말을 들어주는 로이드 씨를 만나 조금이라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나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시가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조차 겁이 났다. 다음 말이 또 거칠게 들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베시가 전에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 다음 말은 다시 차갑고 매서울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붉은 방에서 있었던 그 사건 뒤에 심각하거나 오래 지속되는 육체적인 병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일은 내 신경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내게 남아 있다.
▶ 붉은 방 사건 이후 병을 앓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일은 내게 깊은 충격을 남겼고, 그 충격이 지금까지도 느껴지곤 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