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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21-3장

by 행만이99 2026.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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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열흘이 넘도록 리드 부인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헛소리를 하거나 깊은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의사는 그녀를 괴롭히거나 흥분시킬 만한 일은 모두 금했다.
그동안 나는 조지애나, 엘리자와 될 수 있는 한 무난하게 지내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매우 냉담했다. 엘리자는 하루의 절반을 바느질하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냈고, 나와 조지애나에게 거의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조지애나는 몇 시간이고 자기 카나리아에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대했다.


나는 심심하거나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행 가방에 그림 도구를 가져왔고, 그것이 내게는 좋은 소일거리이자 즐거움이 되어 주었다. 연필통과 종이 몇 장을 들고 나는 자매들과 떨어진 창가에 자리를 잡곤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상상의 만화경 속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장면들을 작은 삽화로 스케치했다.
두 바위 사이로 언뜻 보이는 바다, 떠오르는 달과 그 달 앞을 지나가는 배, 갈대와 부들 사이로 연꽃 화관을 쓴 물의 요정이 고개를 내미는 모습, 산사나무꽃이 만발한 가지 아래 참새 둥지에 앉아 있는 작은 요정….


어느 날 아침에는 얼굴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떤 얼굴을 그릴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부드러운 검은 연필의 끝을 뭉툭하게 깎아 종이 위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넓고 도드라진 이마와 각진 아래턱이 나타났다. 그 윤곽이 마음에 들었다. 내 손은 쉬지 않고 그 안을 채워 나갔다. 먼저 짙고 곧게 뻗은 눈썹을 그리고, 이어 곧은 콧대와 넓은 콧방울을 지닌 또렷한 코를 그렸다. 그다음에는 좁지 않고 유연한 입술, 가운데가 선명하게 갈라진 단단한 턱을 완성했다. 물론 검은 구레나룻도 필요했고, 관자놀이를 덮는 검은 머리카락과 이마 위로 물결치는 머리도 빠질 수 없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눈을 그릴 차례였다. 가장 공을 들여야 했기 때문에 눈은 마지막까지 남겨 두었다. 눈을 크게 그리고, 모양을 정성스럽게 다듬었다. 속눈썹은 길고 짙게, 눈동자는 크고 빛나게 표현했다.
‘좋아. 하지만 아직 부족해.’
나는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좀 더 힘이 필요해. 좀 더 생기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림자를 더욱 짙게 덧칠해 밝은 부분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손길 몇 번으로 그림이 한결 좋아졌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너무도 닮은 모습에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나는 그 그림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 마음도 평온했다.

 

“아는 사람의 초상화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엘리자가 물었다. 나는 그저 상상으로 그린 얼굴일 뿐이라고 대답하며 얼른 다른 종이 밑으로 그림을 감추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 그림은 사실 로체스터 씨를 아주 충실하게 그려 낸 초상화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나 다른 누구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조지애나도 다가와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그림들은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그 얼굴만큼은 “참 못생긴 남자네요.”라고 평했다. 두 사람은 내 그림 실력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자매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겠다고 제안했고, 둘 다 차례로 앉아 모델이 되었다. 조지애나는 자신의 화첩을 가져왔다. 나는 그 안에 수채화 한 장을 그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녀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조지애나는 함께 정원을 산책하자고 했다.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주 허물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두 해 전 런던에서 보냈던 화려한 겨울 사교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찬사를 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는지 이야기했고, 귀족 신사를 사로잡았던 일도 은근히 내비쳤다.
오후와 저녁이 되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달콤한 대화들이 하나둘 재현되었고, 감상적인 장면들도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날 하루 동안 조지애나는 마치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연애 소설 한 권을 즉흥적으로 들려준 셈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다음날에도, 또 그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언제나 주제는 같았다. 오직 자기 자신, 자신의 사랑, 그리고 자신의 슬픔이었다.

이상한 일은, 그녀가 단 한 번도 어머니의 병세나 오빠의 죽음, 또는 집안이 처한 암울한 형편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지애나의 마음은 오직 화려한 시절의 추억과, 앞으로 다시 누리게 될 향락에 대한 꿈으로만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어머니 병실에는 고작 5분 정도 머무르는 게 전부였다.

 

엘리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다. 마치 이야기할 시간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만큼 바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알기 어려웠고,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인 결과가 무엇인지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알람 시계를 맞춰 두고 새벽 일찍 일어났다. 아침 식사 전에는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식사가 끝나면 하루를 일정한 시간 단위로 나누어, 매 시간 정해진 일을 어김없이 수행했다. 하루에 세 번은 작은 책 한 권을 읽었는데, 내가 살펴보니 그것은 《공동 기도서》였다. 어느 날 그 책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물었다.
“전례 규정 때문이야.”
엘리자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하루 세 시간을 들여 거의 카펫만 한 크기의 진홍색 천 가장자리를 금실로 수놓았다. 그것을 어디에 쓰는 것인지 묻자, 최근 게이츠헤드 근처에 새로 세워진 교회의 제단을 덮는 보라고 설명했다. 또 두 시간은 일기를 쓰고, 두 시간은 혼자 채소밭을 가꾸고, 한 시간은 장부를 정리하는 데 사용했다. 누구와 함께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대화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엘리자는 나름대로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이런 규칙적인 생활만으로 충분했다. 시계처럼 정확한 그 일과를 조금이라도 흐트러뜨리는 일이 생기면 그것보다 더 그녀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평소보다 조금 더 마음을 열었을 때 엘리자는 속내를 드러냈다. 존의 방탕한 생활과 집안이 몰락할 위기에 처한 일은 자신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정리했고, 앞으로의 삶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몫의 재산은 이미 안전하게 확보해 두었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랫동안 품어 왔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라고 했다. 엘리자는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회복되거나 오래 살아 계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규칙적인 생활이 결코 방해받지 않는 은둔처를 찾아 들어가, 경박한 세상과 확실한 경계를 긋고 살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조지애나도 함께 갈 것이냐고 물었다.
“물론 아니야.”
엘리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지애나와 나는 공통점이 전혀 없어.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와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아. 조지애나는 자기 길을 가면 되고, 나는 내 길을 갈 거야.”

 

조지애나는 나와 이야기 나누지 않을 때면 대부분 소파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집이 너무 지루하다며 불평했고, 깁슨 이모가 자신을 런던으로 초대해 주기만을 몇 번이고 바랐다.
“한두 달 만이라도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말한 ‘모든 일이 끝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의 죽음과 그 뒤를 이을 장례 절차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엘리자는 대체로 동생의 게으름이나 불평을 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완전히 무시했다.

 

그러나 어느 날은 달랐다.
장부를 치워 두고 자수감을 펼치던 엘리자가 갑자기 조지애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지애나, 너보다 더 허영심 많고 어리석은 인간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너는 태어날 자격조차 없었어.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갈 줄 알아야 하는데, 너는 그저 남에게 의지할 생각만 하지. 너처럼 뚱뚱하고, 약하고, 무기력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를 짐처럼 떠안으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너는 곧 홀대받고, 버림받고, 불행하다고 징징거리기 시작할 거야. 게다가 너는 끊임없이 변화와 자극을 추구하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감옥처럼 느껴지는 거지. 누군가에게 찬사를 받아야 하고, 구애를 받아야 하고, 아첨을 들어야 해. 음악도 있어야 하고, 춤도 있어야 하고, 사교 모임도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 버리고 죽을 것처럼 굴잖아.
너는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의지도 지혜도 없는 거니?
하루가 시작되면 시간별로 나누어서 해야 할 일을 정해봐. 5분도 빈 시간을 남기지 말고 할 일을 정해서 하나하나 엄격하게 일을 해 나가는 거야. 그러면 하루는 시작한 줄도 모르게 끝날 거야.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동행이나 대화도, 동정이나 인내도 필요하지 않게 되지. 한마디로 독립적인 인간답게 살아가게 되는 거야.
이것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야.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든 너는 나도 다른 누구도 필요하지 않게 될 거다. 하지만 이 말을 무시하고 예전처럼 남에게 기대고, 징징대고, 빈둥거리며 살아간다면, 네 어리석음이 어떤 비참하고 견디기 힘든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스스로 감당해야 할 거야.
나는 분명히 말했어. 그리고 잘 들어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는 너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거야. 어머니의 관이 게이츠헤드 교회의 지하 묘실에 안치되는 날부터 너와 나는 마치 모르는 사람들처럼 남이 될 거야. 자매라는 우연한 사실만으로 나를 조금이라도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 둘게. 세상에 너와 나만 남는다 해도 난 혼자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거야.”
엘리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장황한 연설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세상 사람은 다 알아. 네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네가 얼마나 악의를 품고 나를 미워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 예전에도 한 번 똑똑히 겪었잖아. 에드윈 비어 경 일로 네가 내게 벌인 짓 말이야. 너는 내가 너보다 높은 신분이 되는 걸, 작위를 얻는 걸, 네가 감히 얼굴도 내밀 수 없는 사교계에 들어가는 걸 참을 수 없어 했어. 그래서 몰래 염탐하고 고자질해서 내 앞날을 영영 망쳐 버렸지.”
조지애나가 대꾸했다. 조지애나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한참 동안 코를 풀어 댔다.
엘리자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기 일을 계속했다.

진실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찮게 여겨진다. 그런 마음이 부족한 이 자매는, 한 사람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독설에 찬 사람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경멸스러울 정도로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분별없는 감정은 싱거운 물처럼 힘이 없지만, 감정으로 부드러워지지 않은 판단은 사람이 삼키기에는 너무 쓰고 메마른 음식과도 같다.

 

그날 오후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조지애나는 소설을 읽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엘리자는 새로 지어진 교회에서 열리는 성인 축일 예배에 참석하러 나갔다. 종교 문제에서 엘리자는 철저한 형식주의자였다.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신앙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은 결코 거르지 않았다. 날이 맑든 궂든 매주 일요일에는 세 번씩 교회에 갔고, 평일에도 예배가 있는 날이면 빠짐없이 참석했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거의 아무도 돌보지 않는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리드 부인의 상태를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인들조차도 그녀를 간간이 살필 뿐이었다. 고용된 간병인은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틈만 나면 방을 비웠다. 베시는 성실했지만 자기 가족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가끔씩만 저택에 올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간병인은 보이지 않았고, 환자는 꼼짝없이 누운 채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듯했다. 잿빛이 감도는 얼굴은 베개 속으로 깊이 파묻혀 있었고, 벽난로의 불은 거의 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장작을 더 넣어 불을 살리고, 이불을 다시 정돈한 뒤,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바라볼 수 없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창가로 걸어갔다. 빗방울은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고, 바람은 폭풍처럼 몰아쳤다.
‘저기 누워 있는 사람은 머지않아 이 세상의 비바람을 모두 벗어나게 되겠지. 지금 육신이라는 거처를 떠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저 영혼은, 마침내 해방되면 어디로 날아가게 될까?’
그 커다란 신비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헬렌 번스가 떠올랐다. 나는 그녀가 죽기 전에 남긴 말과 흔들림 없는 믿음, 그리고 육신을 떠난 영혼은 모두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되새겼다.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헬렌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평온한 임종의 침상에 누워 창백하고도 영적인 얼굴로, 수척해진 모습과 숭고한 눈빛을 한 채 하늘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던 그녀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때 뒤쪽 침대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리드 부인은 며칠 동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나는 얼른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저예요, 외숙모님.”
“누구지?”
놀란 듯, 그리고 약간 두려운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정신이 혼미한 사람의 눈은 아니었다.
“난 모르는 사람인데, 베시는 어디 있지?”
“베시는 문지기집에 있어요.”
“외숙모라….”
그녀는 그 말을 되풀이했다.
“누가 나를 외숙모라고 부르지? 너는 깁슨 집안 사람은 아닌데…. 하지만 왠지 낯이 익구나. 그 얼굴과 눈, 그리고 이마가 아주 익숙해. 너는… 그래, 제인 에어를 닮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밝히면 그녀에게 충격을 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마 내가 착각하는 모양이야. 내 정신이 나를 속이고 있나 보다. 제인 에어가 보고 싶으니까 닮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 애 모습을 겹쳐 보고 있는 거겠지. 게다가 8년이나 지났으니 그 아이도 많이 달라졌을 거야.”
나는 부드럽게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며, 그녀가 부른 제인 에어가 맞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 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고 정신도 또렷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베시가 남편을 손필드 저택으로 보내 나를 데려오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몹시 위독한 걸 안다. 조금 전 몸을 돌려 보려고 했는데 팔다리 하나도 움직일 수 없더구나. 죽기 전에 마음속 짐을 덜어 놓는 편이 좋겠다. 건강할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도 이런 순간이 되면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법이지. 간병인이 여기 있느냐? 아니면 이 방에는 너밖에 없니?”
나는 우리 둘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나는 너에게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고, 이제는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 하나는 남편에게 너를 친딸처럼 키우겠다고 약속해 놓고 그 약속을 어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 내가 다시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너에게까지 이렇게 비참해지다니 괴롭구나.”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몸을 돌려 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순간 얼굴빛이 변했고, 몸속 깊은 곳에서 어떤 고통이 밀려오는 듯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마지막 고통이 다가오기 전의 전조였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 일은 끝내야겠구나. 차라리 지금 말하는 편이 낫겠어. 화장대 서랍으로 가서 열어 보렴. 거기에 편지 한 통이 있을 거다. 가져오너라.”
나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 편지를 읽어라.”
편지는 짧았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부인께
제 조카 제인 에어의 주소를 알려 주시고, 그 애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가까운 시일 안에 그 아이에게 편지를 보내 마데이라로 와 달라고 청할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저는 넉넉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혼이며 자녀도 없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 제인을 양녀로 삼고, 제가 죽은 뒤에는 남아 있는 재산을 모두 그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마데이라에서 존 에어 올림

 

편지에는 3년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
“왜 저는 이 편지에 대해 한 번도 듣지 못했나요?”
내가 물었다.
“나는 너를 너무나 철저하고도 깊이 미워했기 때문에 네가 잘되는 일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제인, 나는 네가 내게 했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한번은 네가 나에게 불같이 달려들었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증오한다고 말했던 그 말투도 잊지 못한다. 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고 했던,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 눈빛과 목소리도 잊을 수 없어. 그리고 내가 너를 너무도 잔인하게 학대했다고 단언했지. 그날 네가 갑자기 일어나 마음속 독기를 모조리 쏟아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가 발로 차거나 밀쳐낸 짐승이 사람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사람의 목소리로 저주하는 것 같아 두려웠다. 물 좀 다오! 어서!”
나는 그녀가 원하는 물을 건네며 말했다.
“외숙모님, 이제 그런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마세요. 모두 지나간 일입니다. 그때 제가 심하게 말한 것을 용서해 주세요. 저는 그때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날 이후 벌써 8~9년이 흘렀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물을 조금 마시고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복수했어. 네가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편안하고 풍족하게 사는 꼴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실망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제인 에어는 죽었다고. 로우드에서 발진티푸스로 죽었다고 말이다. 이제 네 마음대로 해라. 그에게 편지를 써서 내 말을 뒤집든, 내가 거짓말했다고 밝히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너는 아마 내 평생의 고통으로 태어난 모양이다. 내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만 아니었더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일을 저질렀다는 기억이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까.”
“외숙모님, 이제 그 일은 모두 잊으세요. 저를 좀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용서해 주실 수만 있다면….”
“너는 성격이 아주 나쁘다.”
그녀가 말을 끊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너라는 아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9년 동안 어떤 대우도 묵묵히 참고 견디다가 10년 만에 갑자기 불길처럼 폭발하여 그렇게 격렬하게 변할 수 있었는지, 나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겠다.”
“제 성격은 외숙모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나쁘지 않아요. 저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원한을 오래 품는 사람도 아니에요. 어렸을 때도 외숙모님 사랑을 받고 싶었고, 정말 외숙모를 사랑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진심으로 외숙모님과 화해하고 싶어요. 외숙모님, 저에게 입맞춤해 주세요.”
나는 내 뺨을 그녀의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입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침대 위로 몸을 숙이는 것이 답답하다며 다시 물을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 내 팔에 기대게 한 채 물을 마시도록 도왔다. 그리고 다시 눕히면서 얼음장처럼 차갑고 축축한 그녀의 손을 내 손으로 감쌌다. 그러나 힘없이 축 늘어진 손가락은 내 손길을 피하듯 움츠러들었고, 이미 생기를 잃어 가는 그녀의 눈은 내 시선을 끝내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저를 사랑하시든 미워하시든 이제는 외숙모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외숙모님을 진심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했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시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세요.”
마침내 내가 말했다.


불쌍한 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평생 몸에 밴 마음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한결같이 나를 미워했고, 죽어 가는 순간에도 여전히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간병인이 들어왔고, 뒤이어 베시도 들어왔다. 나는 혹시라도 마지막으로 화해의 기색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30분가량 더 머물렀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끝내 없었다.
그녀는 다시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들었고, 정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12시, 리드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나와 두 딸들은 리드 부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이미 시신이 수의를 입고 염습된 뒤였다. 엘리자와 나는 마지막 모습을 보러 갔다. 조지애나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며 차마 들어갈 용기가 없다고 말했다.
한때 건강하고 활달했던 사라 리드의 몸은 이제 꼿꼿이 굳어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부싯돌처럼 냉정했던 눈은 차가운 눈꺼풀 아래 영원히 감겨 있었고, 이마와 또렷한 이목구비에는 여전히 굽히지 않는 그녀의 강인한 영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시신은 내게 이상하면서도 엄숙한 존재로 다가왔다. 나는 침통한 마음으로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내게 부드러움도, 다정함도, 연민도, 희망도,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고통에 대한 쓰라린 연민과, 그녀의 비극에 대한 괴로움,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마주한 죽음이 주는 섬뜩한 두려움만이 눈물 없는 침묵 속에서 가슴을 짓눌렀다.

엘리자는 어머니의 시신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몇 분 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말했다.
“어머니의 체질이라면 오래오래 사실 분이었어. 마음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서 일찍 돌아가신 거야.”
그 말을 마친 순간 그녀의 입가가 잠시 경련하듯 떨렸다. 그러나 그것도 곧 사라졌다. 그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고, 나도 뒤따라 나왔다. 우리 두 사람 모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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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후기

리드 부인은 죽음이 눈앞에 와도 결국 미움을 떨쳐내지 못했네요. 가는 길조차 편하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제인 에어를 불러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많이 덜었을 것 같네요. 진정한 승자는 제인 에어입니다.

 

그래서 그림자를 더욱 짙게 덧칠해 밝은 부분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손길 몇 번이 성공을 결정지었다. 이제 내 앞에는 한 친구의 얼굴이 있었다. 그 젊은 숙녀들이 내게 등을 돌리고 있으면 어떠한가.
▶ 그래서 그림자를 더욱 짙게 덧칠해 밝은 부분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손길 몇 번으로 그림이 한결 좋아졌다. (이후 문장 삭제)

 

그녀는 하루에 고작 5분 정도만 어머니의 병실에 머물렀고, 그 이상은 결코 있지 않았다.

▶ 어머니 병실에는 고작 5분 정도 머무르는 게 전부였다.

 

조지애나, 너보다 더 허영심 많고 어리석은 인간이 이 세상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일은 아마 없을 거야. 너는 태어날 자격조차 없었어. 삶을 전혀 제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으니까.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너는 그저 자신의 나약함을 다른 사람의 힘에 기대어 매달릴 생각만 하지.

▶ 조지애나, 너보다 더 허영심 많고 어리석은 인간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너는 태어날 자격조차 없었어. 이성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위해 살아갈 줄 알아야 하는데, 너는 그저 남에게 의지할 생각만 하지.

 

너는 스스로 생각해서 오직 자기 자신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볼 지혜도 없는 거니? 하루를 하나 정해 보렴. 그 하루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각 시간마다 해야 할 일을 배정해. 15분이든 10분이든 5분이든 빈 시간을 남겨 두지 말고 모두 계획 속에 넣어. 그리고 차례차례 규칙적으로, 엄격한 질서를 지키며 그 일을 해 나가.

▶ 너는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의지도 지혜도 없는 거니? 하루가 시작되면 시간별로 나누어서 해야 할 일을 정해봐. 5분도 빈 시간을 남기지 말고 할 일을 정해서 하나하나 엄격하게 일을 해 나가는 거야.

 

나는 그녀의 마지막 눈을 감겨 주는 자리에 있지 못했고, 두 딸도 그 자리에 없었다.
▶ 나와 두 딸은 리드 부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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